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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1. 20


Art Basel Hongkong
이 름 IACO (58.♡.1.120)
날 짜 2014-05-16 02:33:50
조 회 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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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Basel Hongkong
 
What an absurd! North Korea?
 
 
 
중국 홍콩에서 14일(현지시간) '아트 바젤 홍콩(Art Basel show in Hong Kong)' 사전공개행사가 열렸다. 방문객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아트바젤 홍콩'은 아시아에서 열리는 최대 규모의 아트 페어다. 15일 개막하는 올해 '아트바젤 홍콩'에는 전세계 39개국 240여 곳의 갤러리가 참가했다. 행사는 오는 18일까지 이어진다. [AP·신화=뉴시스, 로이터=뉴스1]

츌처: 중앙일보

-亞 최대 '아트 바젤 홍콩' 어제 개막
39개국 245개 갤러리 작품 내놔

-급성장한 중국 미술 시장
私立 미술관들 잇달아 개관… 소장품 확보 위해 구매 열올려

"1년 사이 중국인들의 미술 정보가 몰라보게 많아졌다. 작년만 해도 작가 이름도 모르면서 유명하다니까 무조건 작품을 사가던 사람들이 올해는 웬만한 작가 이름을 줄줄 꿴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을 벽면 가득 건 런던 '앤리 주다 갤러리' 부스에서 데이비드 주다 대표가 말했다.

미술 시장에서도 중국의 학습 능력은 빨랐다. 아시아 최대 아트 페어 '아트 바젤 홍콩'(15~18일)의 프리뷰가 열린 14일(현지 시각). 홍콩 컨벤션 센터 전시장에서 만난 주요 미술계 인사들은 하나같이 중국 시장의 급성장과 올해로 2회째를 맞은 홍콩 아트 페어의 정착을 얘기했다.

성숙한 관객, 높아진 작품 수준

아트 전문지 아트넷(Artnet) 칼럼니스트 벤저민 제노치오는 "지역의 작은 아트 거래장에서 도약해 성숙한 국제 아트 페어의 궤도에 올랐다"고 이번 페어를 총평한다. 작년엔 전시장에 서구 갤러리들을 이식(移植)한 듯했지만, 올해는 확실히 홍콩이 '아트 바젤'이란 브랜드를 지렛대 삼아 '예술의 대륙횡단'에 성공한 분위기다.


	14일 홍콩 컨벤션 센터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이 중국 작가 구웬다의 설치 작품‘United Nations(유엔):맨&스페이스’를 보고 있다. 여러 인종의 머리카락을 엮어 유엔 회원국의 국기를 표현했다.
14일 홍콩 컨벤션 센터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이 중국 작가 구웬다의 설치 작품‘United Nations(유엔):맨&스페이스’를 보고 있다. 여러 인종의 머리카락을 엮어 유엔 회원국의 국기를 표현했다. /홍콩=김미리 기자
"우리는 '아시아 미술'을 모은 곳이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시아를 무대로 한 미술 시장의 경향, 즉 '아시아로부터의 예술(Art from Asia)'을 세계에 보여주려 한다." 현장에서 만난 매그너스 렌프루 아트 바젤 홍콩 디렉터는 "갤러리가 내놓은 작품의 질, 컬렉터의 수준 향상을 보면 알 것"이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실제로 주요 갤러리들은 소속 작가들의 대표 작품(signature works)을 가지고 나왔다. 중국 작가들에 집중한 '페이스(PACE)'는 장후안, 송동, 리송송 같은 중국 대표 작가의 대표작을 출동시켰다. '폴 카스민 갤러리'는 인도네시아 현대 작가 뇨만 마스리아디의 대표작을 가지고 나와 개막 전에 이미 35만달러에 팔았다. "그저 돈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인들의 예술에 대한 진정한 목마름이 느껴진다." 주목받는 젊은 작가 헤르난 바스와 서도호의 작품으로 시선을 끈 '리만 머핀 갤러리' 레이철 리만 대표의 얘기다. 25개 중국 갤러리를 포함한 아시아 갤러리들의 전반적인 작품 수준도 높아졌다.

사립 미술관 여는 中 '큰손' 잡기 경쟁

'부디텍이야!' 전시장에 안경을 쓴 한 중년 동양인이 들어서자 관람객들이 곁눈질하며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이번 페어에서 갤러리들이 최대 대어(大魚)로 치는 화교 출신 인도네시아 컬렉터 부디텍(중국명 위더야오·余德耀)이었다. 세계 10대 컬렉터로 꼽히는 그는 이번 주 상하이 도심에 항공기 격납고를 개조한 9000㎡ 면적의 개인 미술관 '유즈(Yuz) 미술관'을 연다. 미술관을 채우려면 상당한 양의 작품이 필요하다. 갤러리로선 놓칠 수 없는 고객일 수밖에 없다.

아트 잡지 '아트아시아퍼시픽' 헨리 고든 마스터즈는 "상하이 롱(Long) 뮤지엄, 난징 시팡(Sifang) 뮤지엄 등 대형 컬렉터들이 소장품을 전시할 사립 미술관을 잇달아 열고 있다. 부동산 가치도 있어 이 추세는 더 강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아트 바젤 홍콩

세계 최대 아트페어인 스위스의 ‘아트 바젤(Art Basel)’이 2012년 기존 ‘홍콩 아트 페어’ 지분 60%를 인수해 만든 아시아 최대 아트 페어. 올해는 39개국 245개 갤러리 참여. 국제갤러리, 학고재, PKM, 스케이프 등 10개 국내 갤러리도 참여했다.


출처:조선일보회째를 맞은 아트바젤 홍콩의 전시장은 동시대미술, 그 중에서도 아시아 미술에 초점을 두었다. 매그너스 랜프루 아시아 지역 디렉터는 245개 참여 화랑들 가운데 50%를 아시아 태평양 지역 갤러리들로 초대했다. 유럽이라면 명함도 내밀 수 없었던 많은 아시아 화랑들이 야심차게 참여했다. 동시에 함께 출품한 유럽-미국 주요 갤러리들도 적극적으로 우수작품들을 내놓아 수장고 세일을 하지 않겠느냐는 비관적 전망들을 일정 부분 잠재웠다.

물론 주요 거래 작품들 경향은 중국 미술시장 중심으로 상당부분 조정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런던 주다 갤러리의 디렉터인 데이비드 주다는 “2013년에 비해 관객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고, 운영·판매 역시 크게 만족할만하다”고 평했다. 한국화랑으로 출품한 학고재 갤러리의 우찬규 대표는 “전시 공간 디자인과 벽에 걸린 작품 내용까지도 몇달 전부터 통제를 받았다”면서 “아트페어의 질적 향상을 위해 그런 엄격함은 오히려 반길만한 것”이라고 했다. 스위스시계 같은 세부에 대한 완벽한 관리는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메인 스폰서가 도이치 뱅크에서 스위스 금융그룹인 유비에스(UBS)로 바뀌면서 컬렉터와 귀빈들에 대한 서비스 역시 차별화를 구현한 느낌이었다.

아트바젤 홍콩은 2008년 시작된 홍콩 아트페어가 모태다. 스위스의 글로벌 전시 마케팅 업체인 엠시에이치(MCH) 그룹이 2011년 아시안 아트페어 공사의 지분을 60% 인수하면서 2013년 새로 문을 열었다. 예술, 디자인, 귀중품 등의 컨벤션 전시를 기획해온 이 회사는 지난 44년간 독일-프랑스 국경과 맞닿은 스위스 바젤에서 아트페어를 운영하면서, 이 작은 도시를 지난해 기준 약 2조원대 매출을 올리는 예술품 거래 중심지, 전세계 예술 전문가와 백만장자들이 매년 모여드는 미술시장 허브로 탈바꿈시켰다.

바젤 외에 미국 마이애미에서 매년 1조원대의 매출을 기록해온 아트페어도 같이 운영해온 아트바젤의 홍콩 상륙은 경쟁자였던 싱가폴, 상하이, 타이페이, 서울 등의 시각예술 시장을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하다. 홍콩은 미술품 수출입 관세와 사치품 제한이 없어, 34%의 관세를 부과하는 중국 본토에 견줘 절대적 혜택을 누린다. 실제로 화이트 큐브, 가고시안 같은 서구 메이저화랑들이 홍콩에 분점을 차려 작품 수장고를 현지화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중국, 대만 뿐 아니라 한국 수집가들까지 직접 현지구매하는 사례도 늘어났다.

10곳이 참여한 한국 화랑업계 관계자들은 공통적으로 이번 페어의 관객, 작품들 수준이 높아 국내 아트페어들과 커다란 격차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한국 미술시장은 본의 아니게 지역 영세시장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도전에 직면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더욱이 2017년에는 3조원을 투입한 ‘M+미술관’이 홍콩 구룡반도 문화특구에 문을 열게 된다. 홍콩의 세계적인 경매시장과 함께 아트바젤 홍콩의 시너지 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다. M+쪽은 이미 동시대 아시아를 대표하는 3000여점의 시각예술 컬렉션을 완비한 상태라고 한다. 개관 시점에는 아시아에서 핵심적인 미술관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유진상 계원예술대교수

흥미로운 점은 M+와 아트바젤 모두 운영의 방점을 ‘교육’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수준 높은 시민들과 더불어 세계적 문화중심 도시의 관객 및 고객을 확보해 나가겠다고 모든 홍보 문구에서 적시하고 있었다. 홍콩의 아트바젤 유치는 서구의 전시기획 및 컨텐츠 생산 노하우를 빨아들이는 동시에 홍콩을 중국 문화시장의 세계화와 아시아 문화시장 지배를 위한 교두보로 삼겠다는 전략으로 비쳤다. 아트바젤 홍콩이 참여 갤러리 선정위원회 라인업을 30, 40대 젊은 전문가들로 꾸려왔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출처: 한겨레신문

 

 바젤 아트페어의 창시자이자, 바이엘러 재단의 창시자로서, 바젤을 세계 미술계의 중심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마이애미, 홍콩 등 전 세계에 ‘바젤 아트페어’의 기운이 흘러들어갈 수 있도록 만든 뿌리와도 같은 존재, 에른스트 바이엘러(Ernst Beyeler, 1921-2010).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기만, 아니 오히려 깊어지기만 한다. 미술시장의 위기와 함께 갤러리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검증이 요구되고 있는 오늘날, 20세기 후반 갤러리의 전범을 보여주었던 바이엘러의 발자취를 쫓아보자.
글: 김영애(이안아트컨설팅 대표)
에디터: 김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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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갤러리로
시작은 오스카 쉴로스(Oskar Schloss)라는 62세 노인의 서점에서 견습생을 하면서부터였다. 교수, 변호사, 의사 등  학식 있는 소수의 지역주민에게 철학, 문학 등의 고전 서적을 판매하는, 규모는 작았지만 매우 신뢰가 깊은 단골을 확보하고 있는 서점이었다. 세계 여행을 하고 싶고,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젊은 바이엘러에게 쉴로스는 마치 개인교사처럼 세계의 역사, 경제, 문학, 철학 등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또한, 게을러서 잘 먹지 않는 개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다른 개를 데려와 먹이 경쟁을 시키는 쉴로스의 아이디어를 보고, 훗날 고객끼리 경쟁시키는 영업 비밀을 터득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쉴로스의 삶을 가까이서 보고 배웠던 것은 바이엘러의 첫 번째 행운이자, 성공비결이었다.
1945년 쉴로스의 예기치 못한 타계 이후, 탄탄한 고정 고객 리스트를 확보하고 있던 가계 문을 닫아버리는 것도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한 바이엘러는 자연스럽게 가계를 인수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적잖은 금액이었던 은행 대출과, 유족들에게도 지불해야 할 인수금 때문에 젊은 바이엘러의 비즈니스는 처음부터 적자로 시작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청년창업을 지원하는 한 투자가를 만나 빚을 갚으면서, 1947년 비로소 첫 전시회를 열 수 있었다. 자금회수를 위해 팔 수 있는 것, 잘 팔릴 것을 중심으로 재배치하고, 잘 팔리지 않는 것은 처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고서점에서 판화 및 프린트 판매점으로, 나아가 미술 전문 갤러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처음에는 일본 판화를 판매하여 재미를 보기도 하였지만, 스스로 판화에 대해서도 일본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일본 판화는 곧 판매 목록에서 누락되었다. 고서적이 사라진 것도, 훗날 사진이 현대미술의 주류로 떠올랐음에도 다루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팔릴만한 것을 살펴보되,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했기 때문이다.

 

바젤, 세계 예술계의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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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바젤은 전혀 미술로 유명한 도시가 아니었고, 스위스의 한적한 작은 소도시에 불과했다. 그러나 바젤은 다른 도시와 달리,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서의 특수성이 있었다. 바젤미술관(Kunstmuseum Basel)은 지역 예술 애호가들의 기증으로 세워진 세계 최초의 공공미술관으로, 덕분에 값진 컬렉션을 구성할 수 있었으며, 1940년대 후반부터 적극적인 컬렉션 정책을 편 덕분에 피카소, 마티스 등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로 낙인찍혀 사라질 뻔 했던 다수의 명작을 구해낸 곳이기도 하다. 특히 1967년의 바젤은 ‘피카소의 해’로 기억되고 있다. 피카소의 작품 다수를 소장하고 있던 컬렉터 스태츨린(Staechelin)의 사후, 그의 아들이 피카소의 작품 2점을 팔기로 결심하자, 바젤의 시민들은 이 작품이 바젤을 떠나는 것에 반대하며 시 차원에서 작품을 구입해야 한다고 나섰다. 젊은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달리며 피카소를 위해 투표해달라고 선전물을 돌렸고, 다수 시민들의 지지로 피카소의 작품 2점이 바젤 미술관에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피카소 역시 기쁜 마음으로 작품 4점을 바젤 미술관에 선물하면서 바젤은 피카소의 명작이 모인 미술관으로서의 명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후 바젤 시민들의 피카소 작품 기증이 이어진 것은 물론이다. 세계 어느 도시에서 이런 현상을 볼 수 있겠느냐는 바이엘러의 긍지는 이러한 역사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바이엘러가 제네바나 파리 등 당대 미술의 중심지를 찾아 떠나지 않고 바젤에 남았던 이유, 1970년 아트페어를 창단하여 바젤을 세계 미술의 중심지로 만들고, 1982년 갤러리 비즈니스를 재단으로 전환시키며 바젤 시에 많은 작품을 기증한 것은 모두 바젤시민으로서의 긍지와 나눔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오늘날 바젤은 바젤 아트페어로 전 세계 미술계 인사와 예술 애호가를 불러 모으고 있는 도시로, 바이엘러 파운데이션을 비롯하여 바젤미술관, 팅겔리 미술관, 비트라 디자인 미술관, 샤우라거 미술관 등 세계 최고 수준의 다양한 미술관이 서로 협력하여 예술 도시로서의 마케팅과 협력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Beyeler Museum 600 400

 
 
기본, 신뢰, 인간미
바이엘러는 어떻게 성공했을까? 사고 싶은 것은 꼭 얻어야 하며 무슨 작품이든 반값에 사려고 버티는 백만장자 컬렉터 앞에서 바이엘러는 기죽지 않았고, 또한 그를 놓치지도 않았다, 다른 딜러들은 며칠 씩 걸려서 작성하는 작품값 측정을 앉은 자리에서 단 2시간 만에 해 냄으로써 그의 환심을 사고, 마침내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굴복하거나 홀리는 것이 아니라 상호 만족할 수 있도록 거래를 성사시킨 것이다, 작품을 해외로 내보내는 것을 꺼려하는 이태리의 보수정책에는, 베니스 구겐하임 미술관을 통해서 미국 미술관이 작품을 살 수 있도록 기치를 발휘하였다. 그 뿐인가, 피카소의 조각 작품을 사고 싶어하는 뉴욕 현대미술관과 절대 팔지 않겠다는 피카소 사이에서 중재에 나서 서로가 원하는 조건대로 협상을 끌어내는 점을 보면 바이엘러는 타고난 장사꾼임에는 틀림없다. 한 딜러는 바이엘러는 레이저처럼 날카로운 두뇌를 지녔다고 회고하고 있다. 특별히 미술사를 공부한 것도 아니면서 명작을 척척 알아보는 것에 대해서도 그저 눈과, 마음으로, 온 몸으로 느낄 뿐이라고 말하는 점도 대단히 ‘감’이 발달한, 타고난 재주꾼이라는 점을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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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작가, 컬렉터, 미술관장 등 어마어마한 사람들을 만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대담록을 보면 마치 그저 아침에는 목욕탕에 갔다가 오후에는 슈퍼마켓에 갔다는 식으로 별일 아니라든 듯이 허세부리지 않고 담담하게 쓰여 있다. (Christophe Mory, Ernst Beyeler: A passion for Art, Scheidegger & Spiess, 2011 참고. 초판은 2003년 프랑스어로 출판) 또한 칸딘스키의 미망인은 남편이 남긴 유작의 대리인으로 바이엘러를 지목하며, 최고의 딜러라고 칭찬하지만, 바이엘러는 도리어 자신은 시대를 창조해내지 못했다며 겸손해한다. 20세기 초기의 딜러들, 즉 앙부르와즈 볼라르는 세쟌, 르누와르, 고갱을, 앙리 칸바일러는 큐비즘을, 시드니 재니스는 몬드라인, 브랑쿠시, 다다이즘을 지지하며 당대의 선구적 미술을 알아보고 이끌었지만, 자신은 그저 인상주의부터 팝 아트에 이르기까지 좋은 작품들이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보급하고, 수준 높은 작품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차분함, 겸손함, 신사다움이 그의 타고난 비즈니스 능력과 결합하면서 진실한 성공을 이끌었으리라. 가령, 갤러리의 일과란 여느 갤러리스트와 마찬가지로, 전화 메일 등 커뮤니케이션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작가, 컬렉터, 미술관계자 등을 만나는 일로 채워지지만 그 중에서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갤러리에 작품을 걸며 전시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한다. 특히 카탈로그는 단지 고객에게 작품을 소개하기 위함이 아니라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정성들여 만든다는 대목은 그의 성공이 어느 날 운 좋게 뚝딱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성실한 작은 하루하루가 쌓여서 만들어졌음을 짐작케 한다.
그의 판단은 피카소와의 인연에서 빛을 발했다. 피카소는 바이엘러 갤러리에서 출간하는 카탈로그를 보고 그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기에, 선뜻 바이엘러를 만나 주었고 이후 좋은 인연이 계속되었다. 딜러로서 돈을 벌고 크게 성공하고 싶으면, 뛰어난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회를 기획하고 카탈로그를 함께 만들라는 그의 조언은, 가장 빠른 길은 결국 가장 정도의 길이라는 깨달음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1997년, 이미 76세에 이른 바이엘러에게 한 기자가 왜 여전히 거래(deal)을 계속 하는지를 물었다. ‘또 다른 좋은 작품을 찾기 위해서’라며, 그는 자신이 여전히 사냥꾼이며, 그것이 바로 삶의 즐거움이라고 답했다. 
 

beyeler - book

 
변화와 적응
바이엘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사뮤엘 켈러(Samuel Keller)다. 1966년 생 바젤 출신으로, 2000년부터 바젤 아트페어의 디렉터로 근무했으며, 2002년 마이애미 아트페어를 런칭하여 성공시킨 인물로, 그의 역량을 오랫동안 조용히 지켜보던 바이엘러는 2008년 그를 바이엘러 재단의 디렉터로 스카우트하여 재단의 미래를 이끌어줄 것을 부탁한다. 바이엘러가 큰 키와 깊은 눈빛으로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보여 주었다면, 켈러는 세련된 패션센스와 총명한 눈빛, 그리고 그를 쉽게 각인시키는 박박 깍은 머리로 젊고 영리한 에너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은 마치 아버지와 아들처럼 다정해 보여, 자녀가 없던 바이엘러에게 켈러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였을 지를 짐작케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켈러가 일했던 바젤 아트페어는 바로 켈러가 태어날 무렵 바이엘러가 창단한 협회이니, 켈러는 바젤이라는 도시, 그리고 바이엘러라는 그 도시의 선구자가 길러낸 큐레이터나 다름없다. 60여 년 전 쉴로스의 서점이 바이엘러의 갤러리로 변화 하였듯이, 바이엘러 재단은 켈러라는 젊은이를 맞이하여 다시 젊게 태어났다. 바로 이 점에 바이엘러 성공의 마지막 비결이 있다. 즉 계속 변화하며 시대에 적응하는 것이다. 바이엘러가 계속하여 고서점을 고집하였다면, 갤러리 비즈니스로만 만족하며 영리만을 추구하였다면, 젊은이들에게 미래의 주역 자리를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바이엘러 재단은 오늘날과 같이 번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fondation beyeler 15.6.07 sam keller,ernst beyeler foto peter schnetz

편집후

 

그는 미술관을 운영할 때에도, 마치 붙박이처럼 한 자리에 계속 걸려있는 디스플레이 방식을 탈피하고자 했다. 과거의 미술관들은 미처 생각지 못하고 답습하던 방식이었다. 미술을 잘 모르는 방문객도 미술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하고, 또한 테마를 주되, 컬렉션을 주기적으로 교체함으로써 계속 새롭게 거듭나는 미술관이 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오늘날의 미술관이 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예를 들어 테이트 모던 미술관은 테마를 바꿔 1-2년마다 주기적으로 상설컬렉션을 바꾸고 있고, 퐁피두 미술관도 특별 전시가 아니면 자료실에 필름으로만 보관되어 있을 비디오 아트 작품을 꺼내 상설전에 소개하는 등 미술관의 혁신과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바이엘러의 선견지명이 비단 갤러리 비즈니스에서만이 아니라, 미술관 운영에서도 두드러진 셈이다. 
 

 

 
   
 
바이엘러가 갤러리 비즈니스를 하던 당시와 지금의 미술계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 처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이엘러는 어느 날 한 여인이 갤러리에 들어와 칸딘스키, 세잔, 고갱의 그림 3점을 즉석에서 사간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세탁부였다가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된 후, 취미거리를 찾아 이제 막 아트 컬렉션을 시작한 부인이었다. 몇 년 후, 너무나 많은 작품을 구입하다가 심지어 빚까지 지게 된 그녀가 다시 찾아와 작품을 되팔고 싶다고 했을 때, 바이엘러는 세 작품을 모두 구입가의 배로 쳐서 되사주었다. 그녀가 빚을 갚고도 남을 만큼의 돈을 들고 은행에 찾아오자, 그 동안 끈질기게 빚 독촉을 했던 은행은 이런 식의 ‘투자’라면 얼마든지 돈을 더 빌려 주겠다며 사과했다고 한다. (아트나우 1권 참조)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바이엘러는 그림에 문외한이었던 부인이 명작을 골랐던 사례를 통해 자신의 직감과 판단을 믿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라고 설명하지만, 컬렉터들은 이런 이야기에서 다른 엉뚱한 교훈을 찾아내기도 한다. 마치 금도끼 은도끼 우화에서 일부러 새 도끼를 받고 싶어서 우물 속에 도끼를 마구 빠뜨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그림을 되팔아 큰 이익을 보았다는 위와 비슷한 사례를 접한 영악한 컬렉터들은 시세차익을 보기 위한 경주에 나서기도 한다. 컬렉터가 아니라 마치 딜러와도 같은 행태로, 재판매 주기마저도 몇 년에서 몇 달로 점차 짧아지고 있다.
바이엘러의 활동 시기, 갤러리스트들은 피카소, 뒤뷔페, 프랜시스 베이컨 등의 대가들은 동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예술가였고, 직접 만나서 대화하며, 그들의 작품을 프로모션 함으로써 시대를 만들어 갈 수 있었지만, 오늘날의 갤러리스트들에게 그런 기회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모던 매스터 작품은 부동산이나 쥬얼리에 버금가는 값비싼 재화가치로 여겨지고 있고, 현대미술은 너무나 다양하고 많아서 일일이 작가를 만나고, 작품을 이해하며 전시를 기획하고 판매를 하는 경우는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 국제화의 물결과 인터넷 등 통신수단의 발달로 세계는 가까워졌지만, 그런 만큼 ‘관계‘는 ’직접, 깊게‘로부터 ’넓고, 얇게‘ 바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바이엘러도 지적하고 있듯이 과거에는 경매가 전문가들 사이의 숨겨진 시장이었는데 이제는 개인 구매자들이 직접 경매에 참여하고 있어 그에 대한 전략과 대응이 갤러리의 생존을 좌우하게 되었다. 아마도 바이엘러가 켈러를 높이 평가한 이유도, 바젤 아트페어를 키워 갤러리 비즈니스를 지속가능한 형태로 이끌어내고, 마이애미로까지 진출하여 바젤의 이름을 드높인 점 때문일 것이다. 
hildy 700
물론 바이엘러는 운도 좋았다. 그의 비즈니스를 후원하고 함께 한 아내 힐디(Hildy, 1922-2008)와 여생을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이엘러가 재정난에 처해 아끼던 작품을 팔고자 했을 때 만약 작품을 팔면 이혼하겠다고 나서며 작품을 끝까지 수호했을 정도로 예술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 그런 커플이었으니 미술작품을 보러 다니고, 사고팔며, 전시를 기획하는 그 모든 삶의 순간들이 생계를 위한 일이 아니라 행복한 삶의 여정이었을 것이다. 금술 좋은 부부는 한 쪽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다른 쪽도 오래 살지 못한다는 옛 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힐디가 먼저 세상을 떠난 후 바이엘러는 급격히 쇠약해져서 1년 반 후 아내 곁으로 떠났다.
    
성공의 정의
미술시장은 예술과 비즈니스라는 어려운 곡예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다. 큰돈을 벌수도 있고, 큰 부를 과시할 수도 있고, 이 모두를 속물적인 것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젤이라는 도시가 있고, 아름다움을 찾는 순례 여행이 시작될 때, 현대미술을 즐기고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 라이프스타일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시작에 바이엘러가 뿌린 씨앗이 있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바이엘러는 바젤 대학으로부터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을 뿐 아니라, 프랑스와 스페인으로부터도 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바이엘러는 기분은 좋지만, 상은 필요하지 않다고 얘기한다. 외부의 인정과 평가가 아니라 무언가를 이루었고 스스로를 증명했다는 자기 확신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강한 자기 확신과 평화로운 내면을 가지고 있는 분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에게 있어 상보다 큰 기쁨은 바젤이라는 소도시에서 6천 프랑의 빛으로 비즈니스를 시작했던 작은 사업이 오늘날 20세기의 대표작을 소개하는 미술관으로 변모하고, 파리, 뮌헨 등 대도시 시민들이 거꾸로 바젤을 방문하는 것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그가 서거한지 이미 3년이 지났지만, ‘바젤‘이라는 도시의 이름이 현대미술과 동의어가 되어갈 정도로 지명도 높은 국제적 브랜드로 자라나고, 우리 모두 그 도시의 예술적 혜택을 계속 누리는 한, 아마도 그에 대한 추모의 열기는 영원히 뜨거울 것이다.   

출처: 이안 아트컨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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