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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일반 포스트모던 비저너리, 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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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IACO (211.♡.52.244) 작성일 06-04-10 18:07 조회 10,15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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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서울 서린동에서 아버지 백낙승과 조종희의 3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경기중·고교를 졸업한 그는 도쿄대 미학미술사학과에 진학하여 졸업논문으로 아놀드 쇤베르크에 대한 논문을 썼으며 1956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프라이부르크 음악학교와 뮌헨대에서 현대음악을 전공했다. 1958년 자신의 인생과 예술세계의 향방을 바꾼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를 처음 만나고, 다음해 갤러리 22에서 백남준의 해프닝 데뷔작인 〈존 케이지에 대한 오마주〉가 초연되었다. 이 공연을 계기로 평생의 예술적 벗 요셉 보이스와 인연을 맺고 함께 1960년대 독일 플럭서스 운동을 주도했다.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TV〉를 시작으로 비디오 아트의 선구적 활동을 전개한 백남준은 1964년 뉴욕에 정착한 후, 첼리스트 샬럿 무어먼과 1977년까지 함께 퍼포먼스를 벌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8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첫 회고전이 열렸고 1984년 파리와 뉴욕, 베를린, 서울을 연결하는 최초의 위성중계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발표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후 1986년 제2편 〈바이 바이 키플링〉, 1988년 제3편 〈손에 손 잡고〉를 연달아 발표했다.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과 서울의 로댕갤러리, 호암갤러리에서 대규모 회고전 〈백남준의 세계전〉이 열렸다. 세계 각지 유명 미술관의 개인전 및 단체전에 참가하여 작품이 소장되어 있으며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1993), 호암예술상(1996), 일본 교토상(1998), 금관문화훈장(2000)을 수상했다. 2006년 1월 29일(현지시각)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자택에서 74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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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dy_s02_02.jpg남준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존재감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는 진정한 아방가르드 예술가이자 지적 탐험가로서 우리에게 많은 유산을 남겨 주었다. 그 유산의 진가를 우리는 그가 고인이 된 이후에야 깨닫고 있다. 고통스럽고 고독한 투병기간 동안 주위로부터 잊혀지거나 일축당했던 그의 존재나 예술세계가 이제 죽음과 함께 되살아나는 이 애도의 순간, 우리의 허탈감과 상실감이 한층 깊어지고 있다. 이미 망자가 된 그를 회상하며 “백남준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하고 자문해 본다. 나는 그를 “포스트모던 비저너리(visionary)”, 포스트모던 시대의 대표적 매체인 비디오로 새로운 예술을 개척한 이 시대의 위대한 상상가라고 부르고 싶다.

백남준은 이미 1986년 프레드릭 제이미슨에 의해 포스트모더니즘의 표상적 인물로 지목된 바 있다(《플래시 아트》 A. 스테판슨과의 인터뷰). 그것은 비디오 예술가로서 “차이의 새논리” 또는 “잠재성의 논리”를 통하여 인간의 지각 능력을 고양하였다는 점에서였다. 제이미슨이 말하는 “차이”는 바로 전자적 탈물질화 과정에 도출되는 시각적 비고정성을, “잠재성”은 기억의 환기를 의미한다. 비디오 이미지는 전자 빛의 흐름에 의해 외곽선을 끊임없이 수정하는 전자적 탈물질화의 과정으로 획득되는바, 기존의 모방적 재현과 무관하고 관찰보다는 과거의 기억에 의존한다. 쉼없이 움직이는 텔레비전 동영상이 정적인 이미지를 볼 때와는 다른 시청방식을 요구하면서 지각주체의 감각체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인데, 이러한 맥락에서 마셜 맥루한은 매체를 “인간의 확장”으로 파악하였고, 백남준은 비디오 이미지의 비고정성을 미학화함으로써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생태학적 예술을 창안한 것이다.

백남준이 비고정성이라는 미학적 기초 위에서 작업한 최초의 비디오 작품은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가진 최초의 개인전 〈음악의 전람회〉에서 발표되었다. 사상 초유의 비디오 전시이기도 한 이 전시회에 그는 텔레비전 내부회로를 조작하여 만든 13개의 서로 다른 다양한 이미지를 선보였다. 일그러진 미국 대통령의 얼굴, 주사선을 단일 수직선으로 변형시킨 〈참선 TV〉 등, “프랑스 치즈만큼” 다양한 종류의 이미지를 얻어 내기 위하여 그는 무수한 기술적 실험을 감행해야 했다. 실험용 텔레비전을 구입하기 위하여 일 년간을 거의 굶다시피하였다는 이 작업에서, 그가 성취한 것은 비고정적 비전이었다. 비디오 아트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비고정성을 매개로 하는 지각 주체와 지각 대상의 상호주관적 교류에 있다. 기존의 정적, 시각적 이미지와 다른 비디오의 동적, 촉각적 이미지가 주체를 활성화시키는 한편, 주체는 자신의 감각체계를 수정함으로써 이에 반응하는 것이다. 기억을 활성화시키며 지각주체의 감각체계를 변화, 확장시킨다는 맥락에서 비디오는 상호소통의 매체가 되는 것이다.


제일의 전략으로 경계 흐리기 구사

1960년대에 비해 1980년대의 광고가 초당 5배 이상의 정보량을 늘리고 지금은 20배에 달한다는 통계는 날로 빨라지는 속도만큼 속도에 익숙해지는 인간의 빠른 적응력을 말해 준다. 특히 빠르게 변하고 이중, 삼중으로 중첩되는 동시에 동시다발적으로 편린화하는 백남준 특유의 비디오 이미지, 포스트모더니즘의 양식적 특성을 대변하는 그의 변화무쌍한 멀티이미지는 이런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사한 양식의 뮤직 비디오나 영상 광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백남준의 비디오는 결국 쌍방향의 참여예술이자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장르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body_s02_03.jpg백남준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포스트모던의 특성은 고급문화와 저급문화, 순수예술과 대중예술, 예술과 일상을 통합시키려는 삶의 예술 의지에서도 명시된다. 매체의 비고정성뿐 아니라, 이분법적 고정관념을 흐리는 인식론적 비고정성에 주목하여 수립된 가치에 도전하는 것이다. 초기 액션뮤직에서 플럭서스 해프닝을 거쳐 비디오 예술에 이르는 백남준의 예술적 여정은 고저의 경계를 흐리려는 비판적 노력으로 노정되어 있다. 음악에 파격적 행동과 에로티시즘을 도입하여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전환시키려 시도하고, ‘지금 여기’라는 현장미학에 의거하여 예술을 일상화, 일상을 예술화하며, 대중매체인 텔레비전과 비디오를 예술매체로 전이시키는 탈경계 발상으로 그는 대중적 접근이 용이한 소통적 예술을 성취하고자 했다. 즉 탈경계, 탈장르 발상이 작품과 관객 사이의 철막을 거두어 주객체가 상호교류하는 소통과 참여의 예술을 실현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비디오예술을 ‘참여TV’라고 명명하는 한편, 관객으로 하여금 화면 앞에 장착된 자석으로 영상을 창조하게 하는 〈참여TV〉(1965)를 제작함으로써 최초의 ‘인터랙티브’ 아트를 구현했다.

비고정성 자체가 탈경계의 동인이자 그 결과이듯이, 백남준은 자신의 미학적, 인식론적 목표인 비고정성을 창출하기 위하여 경계 흐리기를 제일의 전략으로 구사한다. 비디오 예술가로서 그가 우선 흐려 놓은 경계는 예술과 기술이다. 비디오 예술 자체가 기술적 접목을 요구하지만, 백남준에게 기술은 도구 이상의 창조적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나는 기술을 증오하기 위해 기술을 사용한다”는 그의 역설이 시사하듯이, 그는 기술적 원리를 탐구하고 그에 탐닉하는 기술적 동화과정을 거쳐 창조의 단계에 이른다. 백남준은 자신의 기술적 실험을 달마의 고행에 비견했다. 달마가 자신의 배설물로 하반신을 녹이는 9년간의 좌선 끝에 득도하여 부처가 되었듯이, 자신은 9년간의 기술적 실험을 거쳐 비디오 합성기를 개발, 비디오 영상예술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실로 그의 비디오 예술은 기술의 발전에 따른 변화의 양상을 보인다. 텔레비전, 비디오, 영화, 방송, 위성, 컴퓨터, 레이저 등 다양한 기술에 의거해 그는 자신의 비디오 예술을 단일채널 비디오테이프, 비디오 조각/설치, 비디오 퍼포먼스, 위성 비디오, 디지털 비디오, 레이저 비디오 등으로 장르화하고, 그럼으로써 비디오 자체를 진화적인 매체로 확장시킨다.

백남준의 탈경계 의지는 예술과 산업, 예술과 유흥, 예술과 방송 등 존재하는 모든 구별의 경계를 흐리는 대규모의 ‘퓨전 아트’, 자신의 1980년대를 장식한 ‘우주오페라’ 3부작에서 집대성된다. 위성 생방송, 비디오, 컴퓨터 기술이 총망라되고, 아방가르드 예술가, 방송 연예인, 디자이너, 기술자가 대거 동원되어 전지구적 향연을 벌인 이 우주 프로젝트에서 백남준은 전지구적 사방소통을 염원하는 자신의 ‘전자슈퍼하이웨이’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에서는 TV의 일방적, 폭력적 기능을 예고한 조지 오웰의 부정적 시각에 맞서 매체의 민주적, 상호적, 대중적 특성과 그 기능을 강조하였고, 〈바이바이 키플링〉(1986)에서는 동양과 서양이 결코 하나로 만날 수 없다는 키플링의 편견에 도전, 동서양의 만남, 지역적 경계의 해소를 주제화하였다.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에 때를 맞춘 〈키플링〉의 하이라이트는 한강변을 달리는 마라톤 경기의 긴장감이 필립글래스 음악의 격앙되는 리듬에 맞추어 고조되는 장면이었다. 동서양의 지역적, 문화적, 이념적 차이는 미술, 음악, 스포츠와 같은 비정치적 교류에 의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장르의 혼연일체를 이뤄 낸 것이다. “예술과 스포츠의 칵테일”이라는 그의 이러한 퓨전적 발상은 서울 올림픽을 기리기 위한 3부 〈손에 손 잡고〉(1988)에서 기본 테마로 부각되는데, 여기서는 축제의 장을 소련, 중국 등 공산국가로 확장하면서 이념의 차이마저 초월하는 전지구적 소통을 이룩하였다.

백남준이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스트라는 점은 동양과 서양, 아시아와 서구, 전통과 현대의 구분을 초월하는 글로컬 비전을 제시한 점에서 더욱 강조된다. 그의 경우 글로컬 비전은 정체성에 대한 자의식과 맞물려 있는데, 특히 도교, 젠사상, 주역 등 동양사상에 비견될 비고정성 개념을 통해 생예술의 비전을 제시한 존 케이지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뿌리를 성찰하는 계기를 맞는다.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인식으로 그는 서구적 가치관과 전통 미학에 도전, 예술의 사회적 역할, 타자와 주변 문화의 목소리에 대해 주목하는 글로벌하면서도 로컬한 현대적 정치예술을 실천한다.

백남준의 글로컬 비전은 무엇보다 동서의 공동존재와 협력을 개발할 공생 모델의 창안에서 두드러진다. 이러한 견지는 그가 서구 매체인 해프닝이나 비디오아트에 주역, 윤회, 젠사상, 무위, 샤머니즘 등, 아시아의 사상, 정신을 녹여낸 사실에서 입증되는데, 예컨대 실시간 폐쇄회로 작업인 〈TV부처〉 시리즈에서 그는 과거와 현재, 동과 서를 연결시키는 개념적, 은유적 상황을 창출한다. 백남준의 예술적 공헌은 바로 동양철학이나 한국 전통사상을 서구 아방가르드 정신과 결합하여 현대미술 언어로 조형화하면서 글로컬한 고유양식을 구축한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한국의 “백남준”에서 세계적인 “남준팩”이 된 이면에는 이렇듯 한국성, 아시아성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함께 그것을 작품에 녹여 내는 미학적, 조형적 탐구 의지가 깔려 있었다. 어려서 고국을 떠나 홍콩, 일본,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하고 국제적인 예술활동으로 세계인이 된 그에게 이주, 이산, 유랑 등 탈식민주의 이슈와 함께 민족, 인종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자신의 삶, 예술과 분리될 수 없는 의식의 한 층을 형성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가운데 특히 샤머니즘은, 백남준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에 깊이 영향을 끼친 중요한 문화적 인자이다. 그는 우주와 인간, 자연과 인간, 이승과 저승의 소통과 조화를 신봉하는 샤머니즘적 사유방식에 대한 참조, 그 문화적 기능과 의미에 대한 숙고를 통해 대중소통, 관객참여, 나아가 전지구적 문화교류를 추구하는 상호성의 예술을 개념화한 것이다.


예술적 영감과 과학 정신을 겸비한 당대 최고의 예술가

백남준은 샤머니즘 세계관에 입각하여 인류의 기원과 역사를 해석하고, 한국의 선조를 샤머니즘 신화에 결부시킴으로써 몽골, 우랄알타이계의 아시아 정체성을 강조한다. 또한 전술한 1963년 개인전에 방금 잡아 피가 뚝뚝 떨어지는 황소머리를 내걸어 주위를 경악시킨 샤먼적 행위 역시 유럽의 아방가르드 화단에 자신의 뿌리를 알리는 일종의 인종적, 민족적 선언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중앙아시아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경을 헤매다 타타르족의 보살핌으로 회생한 후 샤머니즘에 경도된 요셉 보이스에게 분신과 같은 혈육애를 느끼고 그가 죽은 후 추모굿(1990년 현대화랑)을 열어 준 백남준의 정서를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갓집 자손으로 어려서부터 굿판을 보고 자라난 백남준에게 굿판과 같이 떠들썩하고 혼란스러운 해프닝은, 존 케이지와의 인연이 “운명적”이듯, 어쩌면 백남준을 위한 운명적 장르였는지도 모른다. 백남준은 이렇게 회상한다. “내가 작품을 만들 때 무의식으로 만들지만 나에게 가장 영향을 준 것은 무당이다. 매년 10월이 되면 어머니는 일년 액을 때우기 위해 무당을 부른다. 24시간 해프닝이 된다. 혼을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철저히 밤에 이루어지는 예술. 그것도 그녀의 예술이 된다…. 무당은 돼지머리를 자기 머리 위에 올려 놓고 춤춘다. 그 리듬은 중국 아악 리듬과는 전혀 다르다. 한국의 리듬은 싱코페이션이 있는 삼박자로 3박자, 5박자, 7박자로 이어지는 홀수가 많다. 내가 작곡하면 거의 3박자, 5박자가 되는 것은 결국 내 예술은 한국의 미술… 그중에서도 민중의 시간예술, 춤, 무당의 음악에 가까운 것이다.”
백남준은 작가, 기획자, 흥행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점에서도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볼 수 있다. 우주 오페라 3부작에서는 유능한 흥행사로서 자신의 참여TV 이상을 실현하였고, 1995년 광주 비엔날레 특별전 〈InfoART 정보예술〉에서는 기획자의 시각에서 전세계의 미디어 예술을 한자리에 모아 그 역사적 흐름을 조명, 자신이 ‘인터랙티브 아트’의 선구자임을 과시하였다.

그는 또한 미디어 세상을 지배할 만큼 정보력이 뛰어나다. 투병생활 이전 그의 하루 일과는 전세계의 신문을 탐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세계적 정치인, 연예인의 스캔들로부터 월가의 주가, 한국 신문의 휴지통 소식까지 훤히 꿰차고 있다. 전자산업의 밝은 미래를 점치고 “돈벌이가 될 것 같아” 비디오아트를 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그의 자조적 진술이 암시하듯이, 그의 예술세계는 정보력, 기획력, 추진력, 정치력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구축된다. 이러한 복수 능력 덕분에 그는 만능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 예술적 영감과 과학 정신을 겸비한 당대 최고의 예술가이자 권모술수와 정치에 능한 만능인으로서 르네상스의 이상적 인물로 평가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그는 예술과 정치, 예술과 산업, 예술과 과학의 양면성으로부터 자기 특유의 작품세계를 정립하였다. 고대와 중세의 문화적 과도기에 고대부흥과 모던인간, 이교와 기독교의 이중적 요구로부터 도출된 위대한 르네상스의 양면성과 말기 모던적 현상으로서 문명구조를 해체하는 탈중심주의적 포스트모던의 양면성이 다빈치와 백남준의 유추로 대변되는 듯하다.

백남준은 포스트모던 매체인 비디오에 주목하여 비디오 예술이라는 새로운 포스트모던 장르를 창안하였지만, 모던 아방가르드의 공식적 후예로서 비디오 예술을 형식화, 제도화하는 미술사적 과정을 주도한다. 형식주의, 미학주의 비디오는 그것이 미술관 미술로 수립되는 제도화 과정에 다큐멘터리 정치 비디오나 페미니즘 비디오 같은 커뮤니티 비디오를 주변화하고, 의미의 계급구조, 나아가 젠더의 위계를 발생시킨다는 맥락에서 비평적 공격의 대상이 된다. 특히 백남준의 경우에 샤롯 무어맨과의 에로티카 퍼포먼스에서처럼 여성을 벗기고 여성의 몸을 악기로 전환시키는 남근적 발상으로 인해 페미니스트들의 따가운 시선을 면치 못했는데, 백남준의 비디오를 페미니즘 비평의 시각에서 분석하는 일은 백남준의 예술을 평가하는 데 또 다른 해석의 차원을 마련하는 상당히 흥미있는 연구로 대두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논지는 포스트모던 장르인 비디오를 모더니즘 논리로 형식화, 제도화한 백남준이 여전히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경계에서 양면적 입지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실로 이중주의, 절충주의, 혼성주의로부터 자양분을 섭취하는 전형적인 포스트모던 인간이다. 모던 아방가르드이자 포스트모던 맥시멀리스트, 고매한 예술가이자 성공지향적인 세속인, 사유하는 철학자이자 행동하는 정치가, 서구적 코리안아메리칸이자 끈끈한 정에 묶이는 토착적 한국인으로서 대립항의 양극을 왕래하며 “경계에 살기”를 선택한, 그 위험과 긴장을 유희한 포스트모던 비저너리인 것이다.

백남준의 장례식날 밤, 그의 플럭서스 동료 래리 밀러가 그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백남준은 비디오아트의 아버지로 불리기에는 너무 큰 인물이다. 그는 이미 반세기 전에 현재의 시각으로 미술의 역사를 확장, 재편한 예언자였다.” 하나의 매체, 하나의 주제로 담아 낼 수 없는 글로벌한 시각과 복합적 발상을 가지고 자신이 말하는 비빔밥 예술의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백남준, 그는 결국 전지구와 우주를 상대로 예술적 승부를 건 20세기 최고의 사상가, 최대의 상상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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