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스펙트럼 2006 / 2.16 ~ 5. 14 > 미술계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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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시안내 아트 스펙트럼 2006 / 2.16 ~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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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IACO (211.♡.52.244) 작성일 06-04-10 18:01 조회 9,15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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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스펙트럼 2006전〉은 삼성미술관이 2001년부터 격년제로 개최해 온 “한국 현대 작가 기획전”으로, 올해가 세 번째다. 작년에 세간의 큰 관심을 불러모으며 개관한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여러 장르의 이른바 “꾸준한 성장이 기대되는 작가” 14팀 17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한 이번 전시는 다양한 층위에서 주목할 만하고 논의될 만하다. 렘 쿨하스가 설계한, 현대미술관으로서는 다소 ‘정체 모를’ 블랙박스 공간에 자기 완결적인 14개의 모나드 예술세계(모든 예술작품은 모나드라는 의미에서)가 수렴됨으로써, 기대치 않은 환영(phantasmagoria)이 발생하고 있어서다. 그리고 이 환영이 서로에게 다공(多孔)적으로 침투하면서, 전시공간 연출의 차원에서부터 각 작품의 강도(intensity)까지, 기획의 상징적 의미 차원에서부터 감상자의 작품 지각경험까지 여러 파장을 생산한다. 물론 이 말은 전시에서 발생하는 환영과 파장에 대한 가치평가를 유보해 두고, 그 양상만을 먼저 해석한 것이다.

〈아트 스펙트럼 2006전〉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어떤 구조들을 떠올려 보는 것이 좋겠다. 여기 몇 개의 사물이 있다. 분광기와 볼록렌즈와 블랙박스. 분광기(分光器)는 빛을 한 곳에 흡수·통과시켜 여러 가지 스펙트럼으로 분리시키는 장치다. 이것의 물리적이거나 과학적인 구조가 아니라 ‘기능 구조’는 일단 수렴→자체 분석→분산이다. 볼록렌즈는 대상이 되는 실재를 ‘넓게’ 반영하는데, 빛살을 뒷면 한 점에 모아, 반영되는 형상이 중앙에서 부풀어 왜곡돼 보이게 만드는 장치다. 이것의 기능 구조는 투영→왜곡 반영이다.

블랙박스는 내부 구조도 알려져 있지 않고, 기록된 내용도 해독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장치다. 이것의 기능 구조는 단자(單子)에 정보 입력→비밀 코드화→단자를 통한 해독 불가능/가능이다. 분명 기획 의도에 들어 있던 것은 아닐진대, 〈아트 스펙트럼 2006전〉은 이 사물들의 기능 구조와 유사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분석하자면, 소속 큐레이터가 저마다 2명의 작가를 선정하여(지난 전시까지는 1명) 동시대 미술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는 전시 기획의도는, 이 전시가 일종의 현재 미술의 분광기 역할을 맡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기획전도 작가 일반과 작품 일반이 아니라 특정한 작가와 작품을 선정하여 부각시키는 것인 한, 일종의 볼록렌즈 같은 인식 형상을 만드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현황과 흐름을 반영”하고자 하는 〈아트 스펙트럼 2006전〉은 볼록렌즈와 유비 구조를 갖는다. 여기서 문제는 분광기나 볼록렌즈의 전시 구조에서 자칫 난파되거나 ‘전체’의 ‘부분’으로 평가절하 될 수 있는 주체가 바로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시의 핵인 초대 작품들이라는 점이다. 동시대 미술지평을 조망하는 중요도 높은 전시인 만큼, 애초 큰 기획 아래 모였더라도 일곱 큐레이터의 시각과 의지가 다른 만큼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블랙박스라는 공간의 특수성이 이러한 우려를 매우 흥미롭고 역동적으로 상쇄시키고 있다.

14개의 권역으로 나뉜 작가들의 개별 작품(전시)은 제각각 상이한 맥락에서 충분히 지각 가능하도록 닫힌 세계를 실현한 동시에, 감상자가 블랙박스 안에서 여기서 저기 세계로 건너갈 수 있도록 유기적인 열림을 허용하고 있다. 자, 그러니 어느 세계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작품에 대한 몰입과 전시구조

블랙박스의 심장부로 내려가는 듯한 에스컬레이터 아래 왼쪽으로는 지니 서의 회화 〈In transit〉가 측면을 이루며 건축돼 있고, 그 시선의 끝에는 최승훈+박선민의 설치 작업 〈암호 Ⅳ〉가 맺힌다.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손정은의 〈사랑 2006〉이 있다. 먼저 회화가 건축돼 있다는 것은, 그간 그림의 면들을 조형적으로 오려 겹치는 방식으로 회화의 물리적 공간성을 확장해 온 지니 서가 3차원 입체 공간을 회화로 구성했다는 말이다. 나는 이를 일종의 ‘파사주(passage) 회화’라 부르고 싶은데, 구조면에서 이 회화는 양 벽과 통기성 좋은 천장으로 건축돼 파사주와 동일하며, 감상자의 입장에서는 이 회화를 단일한 오브제로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관통하면서 ‘구경’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최승훈+박선민의 백열등 점자 작업과 화분 설치로, 또는 손정은의 어딘가 창백하고 비의(秘意)적인 ‘사랑’에 관한 짧지 않은 연구 결과물에 이르면 된다. 지니 서의 작품이 진정으로 빛을 발하는 부분이 여기다. 그녀의 파사주 회화는 하나의 구조가 되어 작품 제목처럼 감상자를 다른 작가들의 세계로 이행(transit)시키는 것이다. 지니 서의 스케일 있고 어두운 블루 계열의 추상회화에 대비돼서인지, 손정은이 만든 기이한 형태의 유리 시험관이나 쇼 케이스는 곧 깨질 듯 연약하면서 눈부시다. 그런 표면에 건조한 말의 유혹과 사랑 성공 매뉴얼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설치 작업의 역설이고 역능이다.

최승훈+박선민의 설치작업도 더욱 섬세하면서도 선명한 톤의 작업으로 지각된다. 전시 기간에 직접 기를 식물들과 식물 형상을 암호화해서 쓴 편지와 그 식물들을 찍은 사진이 동시다발적으로 공개된 이 짝 작가의 설치는, 우리의 시각/앎(seeing)의 방식을 세 버전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의 중심에 설치된 백열등 점자 작업은 ‘눈 뜬 장님’혹은 ‘맹목의 통찰’에 대한 코멘트이다. 눈을 뜨고도 헛것(환영)을 보거나 못 보는 일은 일상에서 심심찮게 일어나지만, 미술관은 시각 중심이니 뭐든지 봐야 한다.

임자혁의 〈물결 밑〉이라는 드로잉은 그런 우리 시각의 맹목을 역(易)치환하듯, 블랙박스의 하층과 상층을 잇는 높은 벽면에 그려져 있다. 시선이 쉽게 닿지 않아 당연히 디테일을 볼 수 없는, ‘고래’를 그렸다는 이 붉은 벽화는, 문득 어느 미문(美文)을 떠올리게 한다.(“우리는 충혈된 눈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쯤이고, 몇 시쯤 되었나? 우리는 몇몇 아트 스펙트럼 작가의 창문 없는, 그러나 이행시키는 모나드 세계를 따르다 블랙박스 안에서 길을 잃었다. 모나드를 전체로 통제하고 있는 블랙박스에서 정신을 놓고 길 잃은 우리의 행동은 외부가 안 보이는 백화점에서 그러는 것과 유사하다. 그런 의미에서 〈아트 스펙트럼 2006전〉은 아주 성공적이다. 우리는 미술관 측이 공간 구획으로 은밀하게 지시해 놓은 동선을 따라 외부 현실의 더 넓은 세계는 잠시 잊어버린 채, 환영 속에서 즐거웠기 때문이다.

구체적 가치를 생산하는 미술관

한국에서 현재 ‘작가’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 상황인 만큼 개별 작품의 내용에서부터 경향까지, 미술을 하는 목적에서부터 활동하는 방식까지를 어떤 큰 그물로 들어올려도 다 뜰 수 없다. 한편 기획전이란 그 광대한 예술의 바다에 구체적이고 조밀한 체를 내려 ‘지향하는 바’를 들어올리는 행위다. 그런 한에서 〈아트 스펙트럼 2006전〉은 지향하는 바가 분명해 보이는데, 그것은 앞서 썼듯 대외적으로는 스스로가 한국 현대미술의 분광기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다. 대내적으로는 미술관이 원하는 취향과 건축 공간에 잘 접합되는 작가들로 ‘빛이 날 만한’ 전시를 꾸리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신은 이 말을 전시가 목표하는 바는 분명하지만, 전시의 미술 내적 의도, 즉 담론은 없다는 뜻으로 읽어도 좋다. 그렇게 해서 감상자가 외부 현실/바로 이 전시, 모나드로서의 작품/전체 기획이라는 다른 두 차원의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이질감을 쉽게 감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전시가 이루어진다. 전술한 작가들의 전시말고도 이 기획전에는 다소 재미있고, 다소 지적이며, 다소 첨단 테크놀러지의, 다소 현실 비판적이면서 사변적인 개별 작가의 전시가 외삽되어 있다.

아래층과는 달리 위층 블랙박스는 그야말로 어둠상자 속 작품들로 연속된다. 그래서 더욱 외부와 차단된 은밀한 즐김과 전체 전시 맥락을 꿰기보다는 하나하나의 이미지 표면을 즐길 수 있는 힘이 강하다. 예컨대 송상희의 〈신기루〉는 전국에 모조된 몇몇 광개토왕비 중 하나를 오로지 비닐랩과 스카치테이프로 캐스팅한 입체작품이다. 작가가 외국에 나갈 때마다 어머니가 반찬을 싸준 포장방식을 빌려 만든, 실제 광개토왕비는 없는 붕어빵 같은 남근적 껍질은 어둠 속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우뚝 매달려 있다. 희한한 것은 부박한 재료로 냉소와 비판과 개인적 연민을 버무려 만든 이 작품이 블랙박스 조명 아래서는 마치 고려청자처럼 단아하고 웅혼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신기루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완성돼 보인다. 이 신기루에 눈멀어 옆방으로 흘러 들어가면, 정소연의 비디오 설치작업이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다. 현란한 색띠의 모니터와 자기애에 빠진 듯한 작가의 스튜디오 영상스케치를 흘려 보듯 스쳐, 김성환과 Lady from the Sea가 협업한 영상이 투사되는 방으로 들어서 보자. 남성이 발화하는 언어 내용을 여성이 퍼포먼스로 번역하는 이 영상은 그 자리에서 보면 어쩐지 소피스틱하다. 하지만 만약 이 작품이 단독으로 어느 다른 전시장에서 상영된다는 가정을 해 보면, 도대체 이 작품의 어느 지점이 특별한 기대를 자아낸다는 것인지, 어떤 기획의 고리로 연쇄되는지 회의하게 된다. 그러한 회의는 앞서 블랙박스 아래층 전시장에 있는 천경우의 작품들을 보면서도 잠시 들었던 것이다. 작가는 이 전시에 ‘18분’동안 낯선 타인들이 각자 카메라가 비추는 한 공간에 앉아 있는다, 라고 하는 제한 조건을 설정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훑어내는 영상 작품을 출품했다. 또 특정 개인의 얼굴을 수십 분 동안 장노출로 포착한 초상사진을 선보였다. 갈색 톤의, 카메라 앞에 노출된 채 18분을 견디는 사람들의 영상은 사진처럼 정적인 아름다움을 주고, 얼굴의 레이어가 중첩돼 보이는 초상사진은 명멸하는 영상의 빛처럼 부박해 보인다. 영상이 움직임을 현상하고, 사진이 시간을 잘게 분할하여 완결시킬 수 있다는 매체 특정적 일반 담론을 거슬러 올라가 보려는 이러한 작품은 초기 매체이론의 한계를 뒤집어 비평하는 지적인 시도로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지적 논제를 여타의 많은 작가들이 작품을 통해 구체화했다는 것이며, 사진·영상 매체 이론 또한 이러한 예술실천을 이미 이론화한지 오래되었다는 점이다. 많은 작가들이 이미 했고, 그것이 이론으로 승인되었으므로 어떤 작가도 이를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천경우의 작품들을 회의해 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령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천경우’만의 작품을 보아야 한다면, 그것은 지적 태도를 넘어, 미술관 공간을 넘어서까지 우리를 성찰케 해야 한다. 아쉽게도 나는 아름다운 재현의 빛 속에서, 흔들리는 상(像)으로 아우라를 발하고 있는 사진에서, 이 성찰의 계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김성환의 방을 빠져 나오면 바로 맞닥뜨리게 되는 정정주의 〈빌딩〉은 다른 차원에서 작가의 고유한 작업 세계와 기획전의 만남을 생각하게 한다. 정정주는 실재하는 건축물의 모형을 만들고, 그 모형에 소형 카메라를 설치해 작품의 내부와 그것이 설치된 환경까지를 관람자의 눈앞에 투사하는 설치영상작업을 여러 기획전에 발표해 왔다. 예컨대 〈덕이동 로데오 거리〉가 그렇고, 〈서대문 형무소〉가 그런 맥락에서 산출된 실재이자 가상이다. 실존의 공간을 모형과 영상으로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가상이라면, 국적 불명의 건축양식이 신도시 공간에 횡행하고 있다는 의식이나 역사적 공간이 어떻게 우리 육체와 삶과 관계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작품이 유발한다는 의미에서 실재인 것이다. 그런데 이번 기획전에 정정주는 현실의 구체적 장소가 아니라 일반적인 형태의 ‘빌딩’ 두 채를 인체 비례로 만들어 설치했다. 이 가상 빌딩 사이를 통과하면서 느끼는 감각은 밤늦게 고가도로를 타고 가면서 형광등으로 환하게 불 밝힌 도심 대형 빌딩들을 눈 아래로 흘려볼 때와 닮았다. 거대한 빌딩이 자신의 눈 아래 펼쳐지는 순간, 미니어처 같은 그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백일몽 같아 보이는 감각. 작가가 선택한 제재에 대해 누구도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관객이 거인이 된 듯한 착각 속에서, 작품 내부에 설치된 LED 조명과 정면 높이 투사된 영상의 빛을 좇으며 나아가는 경험을 제공하는 이 작품에 가상말고 어떤 실재가 있는지 물을 수는 있을 것이다.

지면에 모든 작가의 전시를 논할 수는 없지만, 사실 이 전시에 참여한 14팀의 작품들은 이처럼 어둠상자 속에서 달리 보이거나 유독 찬란한 빛을 발한다. 14개의 모나드가 완전히 자율적인 형식과 내용으로 각자의 세계를 이룬 듯 보이지만 삼성미술관의 기획전이라는 분광기 또는 블랙박스 세계의 작은 부분들로 접혀 있어서다. 발터 벤야민은 “작품 안에 인생살이가, 인생살이 안에 시대가, 시대 안에 역사의 전 과정이 보존되고 지양된다.”고 했는데, 〈아트 스펙트럼 2006전〉에는 14권역의 예술세계가 블랙박스 속에 보존된 형국인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 기획전이 이제는 한물간 비엔날레와 유사한 배치와 출품작으로 꾸며졌으며, 전시 기획의도라는 것이 없이 시각적인 효과에 집중했고, 큐레이터가 편협하게 작가들을 선정했다고 비판한다. 그런 비판이 전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전시란 대외적으로 새로운 형식을 추구해야 하고 의도가 철학적 깊이를 지녀야 하며, 작가 선정에 공정성을 기해야 한다는 전가의 보도 식 비판일 뿐이다. 이런 비판은 ‘왜 A 또는 B라는 유형의 전시를 안 하고 당신들 마음대로 했냐’고 비난하는 것이고, 그런 한 넌센스다. 모든 전시에 ‘새로움’이 유일한 가치로 숭앙될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전시란 아주 구체적인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내는데 유효한 장치이다. 전시 의도 또한 철학적이거나 미술이론에 입각해야만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다만 전시가 공적인 액션인 한, 타자 지향적이고 현실 지평을 의식한 기획 의지는 기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나는 이 전시에 대해 비판하고 물어야 할 지점은 다른 곳이라 생각한다. 14팀 17명의 작가가 참여한 기획전이 이토록 안정적이며, 이토록 미술관에 들어맞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혹시 그것은 이 전시가 ‘한국 현대미술의 스펙트럼’이 아니라 ‘블랙박스’가 돼버렸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미술관의 외부는 어디인지. 한 작품 안에 삶과 시대와 역사의 전 과정이 들어 있다고 하는데, 왜 우리는 리움미술관의 〈아트 스펙트럼 2006전〉에 가서 판타스마고리아에 젖게 되는지, 이다. 한때 ‘꿈의 공장’ 영화관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꿈은 잠 속에서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동시에 그로부터 깨어나 현실을 각성케 하고 살아갈 힘을 줄 때, 그 폭발력이 있고 긴 파장을 분출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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