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일반 2005의 예술상 - 함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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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IACO (211.♡.52.244) 작성일 06-04-10 18:02 조회 9,771회 댓글 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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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아는 요즘 아티스트들의 이상이자 글로벌 스탠더드로 표현되는 이주하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유학으로 집을 떠났다가 계속 머물러 있으려고 노력도 했고, 한국으로 와서도 이곳 저곳 다른 세계를 찾아 다녔다. 그 사이 텍사스, 서울, 뉴욕, 샤먼(중국), 도쿄에서 다섯 차례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가하였고 지금도 2년간 네덜란드로 몸을 옮긴 상태다. 그의 신체가 도달할 수 있는 세상의 경계가 새로운 삶의 무대이고 그의 표현처럼 “떠도는 삶, 정주하지 않는 신체” -- 따옴표 속의 내용은 모두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내가 알게 된 것이다 -- 를 가진 세상에 대한 독특한 견문을 예술의 이름으로 표현하며 살아간다. 실제로 함양아의 작업은 개인의 자전적, 주관적 꿈에 대한 탐구로부터 전지구적, 사회적 삶의 지평으로 확장되고 있다. 특히 최근 수 년간의 작업은 우리와 공존하면서도 드러나지 않은 다양한 생활세계와 마주한 자신의 경험 주관 사이의 어떤 지점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자신과 다른 삶의 접변에서 경험한 흥미로운 이야기와 이미지가 어떻게 작품이 되었는지, 그것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내가 함양아를 만나며 던진 질문과 그녀의 여정에서 길어 올린 작품에 관한 대화는 여기서 시작한다. 1996년 이래 발표된 함양아의 비디오 작업은 내면의 독백에서 출발하였다. 초기 작품 〈치즈〉(1996)나 〈지상에서〉(1996)가 시간의 흐름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형식에 충실했다면, 〈감각의 공간〉(1996)이나 〈상처〉(1999), 〈그녀의 꿈속에서〉(1999)는 적극적인 화면 분할, 내러티브, 내레이션, 인터랙티비티 등을 결합하였다. 당시의 육체적 힘겨움 때문인지 음식 만들기와 배고픔의 감각, 신체적 아픔의 시각화, 매일 꾸는 악몽 같은 지극히 사적이고 심리적인 고통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시체(고치)를 떠나는 영혼(psyche)인 나비에서 부활을 보았듯이, 함양아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트라우마에서 피안으로 이끌 ‘꿈’을 찾는다. 뒤이은 작품인 〈몽유도원도〉(2000)나 〈잃어버린 주소〉(2002)는 비디오 설치작업으로서, 카메라와 빔 프로젝트 같은 시각 의존적 매체만이 아니라 다중적인 감각의 잡다한 사물들과 실제의 신체 개입 및 물리적 공간을 결합하며 현실과 환상, 기억과 꿈의 관계를 재조명한다. 〈몽유도원도〉가 미로 체험 같은, 여전히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강박증을 몽환적 이미지로 표현했다면 〈잃어버린 주소〉는 꿈의 주체를 역사적 시공간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자매가 어린 시절 살던 집을 찾아내고 지금은 사라지거나 달라진 자매의 집들을 영상으로 담았다. 어렴풋한 기억 속의 집들을 실제로 찾아 나서고 목격함으로써 함양아는 분명 자신의 물질적 존재의 근거를 다시 발견하고 과거의 삶을 되살렸을 것이다. 하나의 전환점이 된 이 작품 이후 함양아는 꿈과 기억의 세계를 내면의 주관적이며 독립적인 시점이 아닌 실제의 삶에 나타난 ‘리얼리티와 환상’의 관계에서 탐구한다. 더불어 〈More real than this world〉(2003), 〈fiCtionaRy〉(2003), 〈Dream...in Life〉(2004)에서처럼 자신이 아닌 타인의 꿈을 타인들의 동선을 따라 찾아 나서며, 이제 움직이는 그녀의 신체 자체가 가장 중요한 매체가 되기 시작한다. 〈More…〉에서 함양아는 “국가대표 행글라이더와 아마추어 행글라이더 들을 만나고” 그들의 행글라이딩을 위아래가 뒤집어진, 느린 영상으로 제시하였다. “날고 싶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 아무도 후원하지 않는 대표선수를 자처하고 추락으로 인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가족 몰래 다시 행글라이딩을 하는 아마추어들의 색다른 세계”를 접한 함양아는 환상을 꿈꾸고 실현하려는 사람들의 그 ‘환상’을 그들의 세상 속에서 관찰하였다. 〈fiCtionaRy〉(2003)는 한 독립영화의 메이킹 필름을 촬영하면서, 영화 제작과정 자체를 작품의 소재로 이용한 경우다. 함양아는 “지금은 고달프지만 주목받는 영화를 염원하는 제작진들의 기원”과 “스태프의 뜻밖의 실수로 서로 충돌하고 허탈해하며, 갈등하고 상처까지 받는” 현실을 포착한다. 떠도는 삶, 정주하지 않는 신체 〈Dream...in Life〉는 “사회 부적응자로서 어쩔 수 없이 마부가 된 토박이 시카고인 메리앤과 주경야독으로 꿈을 향해 매진하는 아일랜드 이민자인 뉴욕의 에이던이 마부가 된 사연, 자신의 꿈에 대한 이야기, 말에 대한 생각” 등을 전한다. 3개의 파노라마적 화면에 펼쳐진 그들의 이야기는 교대로 프로젝션되거나 동시에 나타나는데, “쓰레기통 하나가 바뀐 것도 알아채는 말의 놀라운 능력에 대한 이야기며, 백마가 끄는 마차여야 한다는 관광객들에 대한 기억, 꿈을 단지 소망으로만 품고 있는 메리앤과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에이던의 이야기(결국 미국에서 성공해 고향 아일랜드로 돌아가고 싶은 소박함)”가 전해진다.참여관찰 방식을 활용한 이러한 작품들을 모두 작가가 어렵고 힘겨운 고비를 거쳐 제작한 것이며, 더욱이 현지인들의 삶과 꿈의 관계가 상상보다 훨씬 이채롭고 더욱 ‘예술적’이었다는 것을 작가와 대화하면서 알게 되었다. 물론 참여 체험(삶)이 곧 작품(예술)이 아니며, 작품으로의 환원(의미화)에는 필연적으로 체험의 변용과 선택, 감환이 뒤따른다. 하지만 그렇게 애써 찾아낸 삶의 에토스들에 대해서도 함양아는 선별하고 가공하는 데는 소홀한 듯하다. 오히려 부분적으로는 담아 내지 ‘않고’ 있는데, 사실 내가 느낀 감흥은 ‘작품’에서 본 것이라기보다 ‘작가’에게서 직접 들은 것이고 -- 대화란 그처럼 서로를 풍부하게 감응시키는 최선의 형식이다 -- 시각적인 것보다 언어적 설명이 인상적이었다는 나의 체험은 작품에서 시각적인 것의 분명한 침식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영화조차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기 위해 감독은 글을 동원한다. 그러나 함양아는 실제 전시에서 결코 이러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영상은 지나치게 무덤덤하고, 사운드(혹은 노이즈, 혹은 파롤)는 지루할 정도로 비슷한 톤을 이어간다. 나는 예외적으로 작가와 대화할 기회를 가짐으로써 그의 작품에 대한 ‘선입견’과 ‘새로운 이해’ 사이에 놓이게 되었으며, 더불어 명확해진 함양아의 작품이 내포한 가치와 가능성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나는 함양아의 가장 최근 작품인 〈기억의 환영들〉과 〈10 to 3〉를 검토하며 시각적인 것의 침식에 대한 문제를 여러 차원에서 답해 보고자 한다. 중국 체류중에 제작한 이 작품들 중 우선 〈기억의 환영들〉(Fahre굏tin Orenli와 공동작업)은 자본주의화의 상징으로서 도시에 정착하고 싶은 농촌 출신자들의 과거(고향)와 현재(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주로 소수민족인 도시 유입자들은 성공을 위해 직업을 갖고자 노력하며”, 작품의 모티프가 된 함양아의 “중국인 친구 역시 요리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직업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도시에서의 삶”을 보여준다. 한편 마주한 반대 벽면에는 그와 함께 찾은 친구의 고향 -- 물물교환과 공동체적 관습이 유지된, 유교적 전통이 강하게 자리잡은 -- ‘씨족마을’ 사람들을 투사한다. 여기서 작가는 마을 사람들이 돼지를 잡아 나누는 모습, 도시와는 다른 시골 어린이의 놀이 방식, 초라한 마을 상점, “삶과 죽음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존재들”을 관찰한다. 〈10 to 3〉는 관광지 양수오의 하루를 관찰한 기록이다. 산과 강으로 고립된 양수오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 때문에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주민들의 삶도 바뀐 곳이다. 여객선이 정박하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그곳은 한시적으로 관광도시로 바뀐다.” 거리는 소란스러운 노천 벼룩시장으로 탈바꿈하고 다양한 기념품과 먹거리가 즐비하지만 마지막 배가 떠난 후부터는 그들만의 공간으로 다시 돌아간다. 밤의 어둠은 춤과 음악으로 가득 차며 원주민들의 동일 공간에 대한 상이한 활용 방식을 관찰한다. 나는 함양아의 작품에 나타난 시각적 침식을 세 가지 면에서 말하고자 한다. 우선은 함양아가 이미 알고 있으며 매우 중요한 점이다. 작가로서 함양아의 관심이자 내가 보기에도 침식에 대한 하나의 탈출구는 “영화도 다큐멘터리도 아닌 자신만의 비디오 형식을 고안하는 것”이다. 그가 3채널의 영상을 수평으로 펼치거나(〈Dream...in Life〉) 수직으로 배치하는(〈Transit Life〉, 제주도행 페리호의 선내 모습을 담은 작품) 공간 은유적 비디오 인스톨레이션 방식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거나, 뒤집어진 화면과 느린 전개를 통한 기록성의 해체 시도(〈More…〉), 영화적 스트리밍을 시사하며 ‘흐르는 화면’을 만드는 것(〈fiCtionaRy〉), 영상을 마주보게 투사하며 정지와 플레이를 교차함으로써 회화적 동영상을 만드는 설치(〈10 to 3〉, 〈기억의 환영〉) 등에서 나타나듯, 비디오 제시, 설치 방식의 실험은 그녀를 주요한 비디오 아티스트로 규정하는 확실한 계기가 된다. 더욱이 작가는 “흔들리는 카메라와 초점 잃은 화면, 잡음, 압축적 편집의 거부” 등이 자신의 비디오 언어를 구분하는 특징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비디오 형식의 실험에도 함양아의 영상은 동시대 이미지의 현란함과는 구별되는 단조로움이 뚜렷하며, 메시지 전달은 간접적이고 대개 적극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작품의 이야기도 전개되다가 멈춰 버리고 모호하게 사라진다(반복한다). 잘 다듬어진 서사, 이완과 긴장의 연출력, 상상력으로의 초대, 그야말로 형식적인 시각적 자극으로서 비디오 아트의 동시대적 추이와 분명한 거리가 있는 함양아의 영상은 그래서 관객에게는 기나긴 지루함과 동어반복의 패턴으로 보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이질성이 함양아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특성이 되며, 설정한 테마에 매우 적합한 형식이 된다는 점이다. 함양아의 강점은 여기서 찾을 수 있는데, 대상(대개 타자의 삶과 꿈)에 대한 통찰과 교란의 교차 제시를 통해 관객이 어떠한 설득보다는 발견(혹은 선택)할 수 있게끔 유도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작업 태도는 삶의 체험에 대한 예술적 환원을 작품화하는 한 지속될 것이다. 그래서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이 함양아의 삶의 체험과 예술적 환원의 관계이다. 대상과의 거리감으로 인한 긴장감의 부족 둘째는 체험된 것에 대한 예술적 통찰과 교란이다. 함양아의 체험은 참여관찰의 체험으로서, 머리와 지식만이 아닌 신체와 시간 경험이 종합된 생체험(Erleben)이다. 메를로 퐁티는 화가의 신체가 체험에 대한 성찰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고 했다. 주체의 육화된 경험을 말하는 체험은 신체와 세상이 만나는 장이자 신체와 세상을 두루 의미있게 만드는 에너지이며, 체험에서는 신체와 세상이 어느 것으로도 분리될 수 없다. 그의 관점처럼 작가의 창작이 체험한 ‘신체에 새겨진 의미’를 드러내는 과정이라면, 의미를 현상하는 과정은 의미의 단순한 반영이나 재구성이 아니다. 실제로는 다양한 통찰과 교란이 공존한다. 함양아의 체험은 신체의 지혜를 확인하는 것이면서도 이미 제도화한 양식이기도 하다. 제도화는 현지 거주라는 서구식 작가 프로모션 제도에 참여함으로써 생성되기도 하지만 “어떤 시스템에도 들어가지 않”으며 이방인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작가적 태도를 유지한다는 면에서도 그러하다. 이미 시스템 속에서 움직이는 작가가 ‘거리를 두겠다’고 기대함으로써 통찰과 교란은 불가피하다. 나는 함양아의 이런 관찰자적 태도에서 ‘강한 주체’를 본다. 〈기억의 환영들〉에서 제시된 씨족마을은 공동체의 삶을 전하기보다 낙후성과 저개발됨으로써 (동양적인) ‘자연’스러운 “애니미즘적” 상황을 ‘확인’하는 눈을 보여준다. 작품의 긴 시간을 돼지 도살의 액막과 기원의 제의에 할애하는데, 그것은 도시와 시골, 근대와 전근대, 산업화와 전통, 서양과 동양의 거대한 이원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표현언어(일종의 제도화한, 표준화한 동양의 재현방식)를 재생산하는 것에 가깝다. 이처럼 함양아는 작품에서 특정인이 특정한 공간(도시와 시골)에서 행한 삶을 실측했음에도 그것을 계량적으로 비교하는 감환을 수행한다. 때문에 시각과 지혜가 위축된다. 함양아는 자신의 표현이 사실성과 거리를 유지할 것을 원하지만(“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관점과는 구별되는 작가주의 관점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 그 때문에 작업의 “긴장감이 부족”하다고 본다. ‘부족’함의 원인은 내가 보기에, 그녀가 낯선 땅, 사람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익숙함을 찾아내는 신체의 적응력과 훈련에도 불구하고 다시 경험하는 낯선 삶의 어색함과 불편함, 소통의 실패와 오해의 과정을 작업 내용으로 채택하지 않는 것에 있다. 그녀는 이성의 빛을 따라 작품을 만들며, 낯선 시공간에서도 스스로 희미해진 기억이나 습득된 취향을 확인하는 작가이다. 중국에서의 체험은 어린 시절의 추억과 자연의 순리를 따른다는 관념화한 동양적 삶의 패턴에 대한 내밀한 선호도를 작품으로 확인한 것처럼 보인다. 작가가 타자에게 카메라를 향할 때 그들을 미리 예견하고 이미 주어진 시나리오나 가설이나 선입견에 따라 기록한다면, 이미 작가는 거대한, 강한 주체의 편견으로 자신과 그들을 구분하며 대상화하고 물화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침식을 재고할 틈새의 가능성을 강한 주체에 내속되고 소여(given)된 것을 성찰할, 체험하는 신체의 수용성과 개방성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함양아의 작업이 현지에 투신하고, 사람들을 직접 대면하며 자신의 신체적 체험을 확장하여 생애적 경험을 예술로 환원하는 것이라면, 그녀는 자신에게 소여된 것으로부터, 이미 결정된 자신의 선입견으로부터, 신체의 훈련으로 익숙해진 것으로부터 벗어난 채, 타자의 생애와 생활세계에 자신을 끊임없이 개방해야 한다. 이로써 대상을 ‘자연’스럽게 발견하며, 자신의 경험을 설득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기존 예술주의와는 다른 예술의 지평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삶의 얼굴들이다. 삶의 얼굴은 함양아의 작품이 보여주는 현재적 특질이 아니라 이미 작가가 짐작하고 있을 잠재적 가능태를 위한 표현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듯, 존재는 언제나 존재자의 존재다. 삶은 언제나 존재자의 삶으로써 삶의 구체성과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실존과, 그 실존하는 삶들의 관계와 그 관계들의 역사와 시간 속에서 존재를 드러낸다. 이것이 세상이며 (가다머를 따라) 그 세상에 대한 해석(창작)이 이해를 앞서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해석의 전제가 된다. 예술적 해석의 경우, 작가의 관점(이해)을 앞세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의 삶에 대한 자신의 체험을 이해하고 이로써 예술적 해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병아리의 부름에 어미닭이 함께 알을 깨뜨림(彫琢)으로써 탄생이 이루어지듯, 창조도 고유한 개별자들 자신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 함양아의 작품에 나타난 시각적 침식은 고유한 개별자에 대한 묘사는 있으되 상호적 발견에는 서툴고, 관찰은 있으되 이해는 부족한 상황과 관련된다. 자신의 선이해로 생성한 해석이란 체험의 풍부한 전후 관계나 맥락을 제외하고, 감각 경험적 기록과 이성의 정언명령에 충실하기 쉽다. 결국 작품의 이미지는 체험과 존재자의 삶으로부터 이탈하여 이미지로 추상되며 강한 주체의 지속적 승리를 표방한다. 여기서 제외된 것들이 바로 스스로 체험한 신체에 각인된 타자의 얼굴(존재)들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인간은 다르기 때문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고유하기 때문에 다르다. 함양아의 고유함과 함께 모든 존재자가 고유하다는 것을 우리는 타자의 얼굴과 대면하면서 실감한다. 주체의 본질을 타자-주체로 표기할 만큼 자신보다 타인을 우선하는 윤리철학자 레비나스의 사유를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은 바로 고유한 타자의 얼굴들과 늘 마주하는 과정임은 분명하다. 내가 경험한 그 어떤 예술에서보다 타자에 대한 개방성이 잠재한 작가이기에, 함양아의 비디오 오디세이아에서 이것을 한번쯤 생각해 보길 바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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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아는 1968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서울대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대학원(미술이론 전공)을 졸업했다. 뉴욕대 대학원(미디어아트 전공)를 졸업했다. 1994년 나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후 지난해 〈Transit Life전〉(금호미술관)까지 총 5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지난 해 ‘2005 올해의 예술상’(한국문화예술위원회) 미술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현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라익스아카데미 스튜디오 프로그램에 참여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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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in Life〉는 “사회 부적응자로서 어쩔 수 없이 마부가 된 토박이 시카고인 메리앤과 주경야독으로 꿈을 향해 매진하는 아일랜드 이민자인 뉴욕의 에이던이 마부가 된 사연, 자신의 꿈에 대한 이야기, 말에 대한 생각” 등을 전한다. 3개의 파노라마적 화면에 펼쳐진 그들의 이야기는 교대로 프로젝션되거나 동시에 나타나는데, “쓰레기통 하나가 바뀐 것도 알아채는 말의 놀라운 능력에 대한 이야기며, 백마가 끄는 마차여야 한다는 관광객들에 대한 기억, 꿈을 단지 소망으로만 품고 있는 메리앤과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에이던의 이야기(결국 미국에서 성공해 고향 아일랜드로 돌아가고 싶은 소박함)”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