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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일반 한국여성 최초 미술 유학길 미개척분야 서양화에 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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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on (58.♡.1.39) 작성일 06-02-16 12:35 조회 8,42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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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화백(1896~1946)
 
1925년 5월 한 신문과 인터뷰에서 나혜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가 있었냐고요? 간단합니다. 어려서부터 무엇이든 연필로 그리려고 했죠. 한번은 학교 뒤뜰의 꽃을 그려서 선생님께 보여드렸더니 칭찬을 많이 하셨어요. 그림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는지 없는지 몰랐는데 둘째 오라버니가 미술학교에 입학하라고 했죠."
당시 고희동이 한국인으론 최초로 미술수업을 위해 1910년 동경유학을 했고, 그 뒤로 김관호, 김찬영, 이종우 등으로 이어지는데 1913년 나혜석이 여성으로는 첫째요, 한국인으로서는 네 번째로 동경으로 유학(동경여자미술학교)을 갔다. 이후 1918년 졸업하면서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가 됐다. 도전적 성격의 나혜석은 당시만 해도 불모지대인 서양화에 관심을 두고 매진했다. 1920년부터 시작된 김우영과 10년간의 결혼생활 중 나혜석은 많은 서양화 작품을 제작해 선전 등에서의 입선, 특선, 3등상 등을 거듭하며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나혜석은 여성해방운동도 전개하면서 신문, 잡지 등에 여성들이 봉건제도의 모순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지론을 계속해 발표했다. 그녀는 1921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인형의 집'에 유연하고 세련된 필치로 삽화를 그린 적도 있다. 1924년에는 여성해방과 인간존재를 내포하고 있는 시 '노라'를 썼다. "나는 인형이었네/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남편의 아내 인형으로/…순수히 놓아다고/높은 장벽을 열고/깊은 규문을 열고/자유의 대기 중에 노라를 놓아라/나는 사람이라네/남편의 아내 되기 전에/자녀의 어미 되기 전에/첫째로 사람이라네/.../천부의 힘이 넘치네 아아 소녀들이여/깨여서 뒤를 따라오라/일어나 힘을 발하여라…"
나혜석은 음악평도 발표했다. 유명한 성악가 윤심덕에 대한 평이다. "…음량은 충분하다.… 소프라노 음량이 아니요, 알토음이다. 다른 때 독창한 것도 음악이란 것보다 창가이었다.…" 나혜석은 문학, 전시평도 썼고 김우영과 이혼할 때도 이혼고백서라는 글을 남겼다. 고백서에는 "내 개성을 위하여, 일반여성의 승리를 위하여"란 내용도 들어있다.
이혼 후 1935년 '삼천리' 2월호에 기고한 '신생활에 들면서'에서 나혜석은 서른아홉의 나이로 아이들에게 유언 아닌 유언을 남겼다. "아이들(4남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적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의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느니라.…" 나혜석과 비슷한 시기에 동경에서 유학한 필자의 선친이 나혜석, 윤심덕 같은 불행한 여성상을 보았음이었을까. 선친은 예술을 전공하고 싶어하는 필자의 진로를 한사코 말리시며 약학을 선택케 하셨으니 이제야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 헤럴드 경제 ] <선화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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