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A 현대미술의 거장 Story-김보현 > 이야기 마당

본문 바로가기

USA 현대미술의 거장 Story-김보현

페이지 정보

작성자 IACO (110.♡.13.4) 작성일 12-04-30 01:05 조회 6,256회 댓글 0건

본문

[Why] 94세 美현대미술 거장 김보현 "100살 땐 꼭 서울 전시회"

입력 : 2012.04.28 03:08 | 수정 : 2012.04.29 12:10

일주일에 세 번 신장투석
작년 입원했을 땐 어두운 그림 구상 퇴원하고 보니 밝고 아름다운 색 나와 생의 환희라고나 할까
韓~日~美 인생역
정초등학교만 나온 김보현 21세 때 일본 건너가 무작정 그림 공부 뉴욕에선 불법체류까지
나 자신을 위해 그린다
구겐하임도 소장할만큼 그의 작품 인기지만 판 건 열 점도 안 돼

뉴욕 남쪽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이스트 빌리지(East Village) 라파예트가(街)에 '실비아 왈드 & 포 김 아트 갤러리(The Sylvia Wald & Po Kim Art Gallery)'라는 미술관이 있다. 이곳의 주인이 올해 94세인 한국인 화가 김보현이다. 1955년 미국으로 건너가 줄곧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그림을 팔지 않았기에 한국에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국 현대미술의 거장이다. 그의 작품은 구겐하임과 시카고 미술관에도 소장될 만큼 널리 인정받았다.

평생 반려자였던 그의 아내이자 조각가 실비아 왈드마저 작년 봄 95세를 일기로 숨진 뒤, 노옹(老翁)은 오직 캔버스 앞에서 붓을 잡거나 집 안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앵무새들과 대화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지난 13일 뉴욕 그의 갤러리를 찾아갔을 때, 그는 병원에서 신장투석을 마친 뒤 휠체어 타고 갤러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작년 11월 그림을 정리하다가 넘어져 엉덩이뼈를 다쳤는데, 항생제 치료를 하면서 신장이 악화됐다고 한다. 그는 "이제 죽을 때까지 매주 3회 매번 세 시간씩 신장투석을 해야 한다"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icon_img_caption.jpg 1955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작품 2000여점을 남기면서도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국 현대미술의 거장 김보현. 그는 94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캔버스 앞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붓에 적셔 색칠한다. 그는“예전에는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요즘엔 한국에 가고 싶은 생각이 가끔 든다”고 했다. 아 래는 그의 사실주의 작품인‘생선(왼쪽)’과‘붉은 양파’./뉴욕=한현우 기자 hwhan@chosun.com
"평생 한국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 한국에 가고 싶을 때가 있어요. 모르겠어요, 이게 다 내가 죽을 때가 가까워진 건지…." 그는 작년에 좌골이 부러진 뒤 죽음에 대해 부쩍 많이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백 살까지 그림 많이 그려서 백 살 때 서울에서 전시회를 크게 하려고 했는데, 이래 갖고 백 살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추상을 주로 그려 온 그의 그림은 퇴원 후 한층 밝아졌다. "석 달간 입원해 있을 때 천장하고 벽을 캔버스 삼아서 상상으로 그림을 그렸지요. 그때 구상한 그림이 꽤 있는데 아마도 프리다 칼로의 그림처럼 어둡고 우울한 그림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와보니 완전히 다른 그림이 나옵니다. 밝고 아름다운 색이 나와요. 생의 환희라고 할까, 그런 것이 내 그림에 묻어나와요."

1917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김 화백은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뒤 "너무 가난해서" 더 이상 진학하지 못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1학년 때 이미 그림으로 학교 대표를 맡을 만큼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결국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21세 되던 해였다. "10전, 20전씩 모은 돈이 30원쯤 됐을 때 대구에서 부산, 시모노세키를 거쳐 도쿄로 건너갔다"고 했다. 그곳에서 메이지대(明治大) 법학과와 '태평양미술학교'를 동시에 다니며 공부한 그는 광복 직후인 1946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당시 조선대가 미대를 신설하면서 그를 교수로 초빙한 것이다. 그는 조선대에서 9년간 일한 뒤 1955년 교환교수로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로 옮겼다. 그러고는 그냥 미국에 눌러앉아 버렸다.

"여기가 매력이 많아서 그냥 눌러앉았어요. 당시에 한국엔 미술가도 화단(畵壇)이란 것도 없었어요. 교환교수 2년이 끝난 뒤 뉴욕으로 이사했죠. 뉴욕이 세계 미술의 중심이었고, 지금도 그러니까. 불법 체류로 체포당하기도 했지만 그냥 안 나가고 버텼어요. 그림을 그리려면 이곳에 있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나마 조선대와 인연 맺은 덕분에 그는 1990년대부터 한국에 조금씩 알려졌다. 조선대는 지난 2000년 그의 작품을 기증받아 미술관 내에 '김보현실'을 마련했고, 작년 9월 '김보현·실비아 왈드 미술관'을 정식으로 개관했다. 이 미술관에 김 화백의 그림 320점과 실비아 왈드의 작품 90여점이 기증됐다. 1995년 예술의전당 회고전 때 32년 만에 한국을 처음 방문하고, 작년 조선대 미술관 개관식에 참석했던 그는 내년 5월 경남도립미술관 전시를 앞두고 있다.

뉴욕에 눌러앉아버린 김 화백은 뉴욕 남부 소호 거리의 넥타이 공장에 취직했다. "화가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갔는데, 주어진 일이란 넥타이에 붓으로 점과 선을 그리는 것이었다. 시간당 1달러를 받으며 하루 8시간 동안 넥타이에 그림을 그렸다.

"그래도 뉴욕에 있어야 했어요. 미술, 음악, 무용, 영화 모든 게 여기서는 활발하죠. 예술학교도 많고 자유롭고요. 파리가 미술의 중심이라고 하는 말은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파리는 2차대전 때 이미 모두 끝났죠. 파리에서 공부한 일본인들에게서 미술을 배운 사람들이 파리, 파리 하는 거예요."

그는 1960년대 중반 소호(SoHo·South of Houston)의 탄생도 지켜봤다고 했다. "내가 1958년까지 소호에서 살았어요. 60년대 들어 소호에 있던 공장들이 이사 가면서, 빈 공장을 작업실로 쓰려는 화가가 많이 이사했죠. 그러면서 소호가 탄생한 건데, 이제는 또 완전히 달라졌어요. 예나 지금이나 미술이 중심인 곳은 이스트 빌리지뿐이죠."

김 화백은 그러나 히피 문화에 빠진 적은 없다고 했다. "히피는 너무 자유스럽고 무책임했어요. 한 번은 내 자전거를 어떤 사람이 훔쳐가기에 '그거 내 자전거야' 하고 소리쳤더니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더군요."

갤러리가 있는 8층짜리 건물에서 4층이 갤러리, 7·8층이 김 화백 부부의 작업실, 옥상에는 정원이 마련돼있다. 8층 작업실에는 커다란 새장이 있어 '찰리'라는 이름의 파란색 암컷 앵무새와 핑크색 깃털을 뽐내는 '점블'이란 앵무새가 수시로 소리를 냈다. 그는 이곳에서 줄곧 작업을 하면서 백남준·김환기 등과 교류하며 작품 2000점가량을 남겼으나 값을 매겨 판 작품은 열 점도 되지 않는다. 김 화백은 "나는 그림을 누구를 위해서도 그리지 않았다. 나 자신을 위해 그린 것이므로 그림을 파는 일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1968년 미국인 아내와 결혼한 그는 슬하에 자식을 두지 않았다. 남편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던 그의 아내 역시 1955년 '미국 현대미술 50년전'에 작품이 선정될 만큼 명성을 누린 예술가였다. 김 화백은 "내가 미국에 눌러앉은 것도, 자식도 마누라도 없이 이렇게 아직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내게 지워진 운명"이라며 희미하게 웃었다.
출처: 조선일보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IACO ㅣ 국제미술협력기구 | 사무국 121-622 ㅣ 서울시 마포구 망원1동 411-42 ㅣ License No:000-0000
Manager:02-556-1643 ㅣ E-Mail:
ㅣ 개인정보관리자:이붕렬
상담가능시간 10:30~14:00, 16:00~21:00

Copyright © 2006 by ARTIACO.com/ All rights reserved.

[ADMIN]